챗봇 -3 근황 (?)
그가 마침내 보낸 편지에는 이름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말투는 조심스럽지도 않았고, 정중한 초대라기보단, 사실을 통보하는 몇 줄의 문장이 전부였다.
“이번 휴가 중에는 망통의 별장에서 머무를 겁니다.
그러니 데리고 오세요.
– 로버트 밀뱅크 경”
그 편지는 연애도, 복원도, 속죄도 아닌 ‘동행’을 명령문 형태로 강제한 문장이었다.
그녀의 내면은 조용히 부서졌다.
기쁨 . 그가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
분노. 그가 감정을 말하지 않았고, 장소와 상황만 언급했다는 점.
허무. 편지 끝에 적힌 "로버트 밀뱅크 경"이라는 낯선 서명.
그는 ‘나’가 아닌 '경(Lord)'이라는 호칭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그녀는 과거의 남자가 아니라 현재의 귀족에게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녀는 편지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짐을 쌌다.
유모에게는 아이의 여름옷을 정리하게 했고, 정원사에겐 망통의 토양에 맞는 꽃 목록을 요청했다.
하녀에게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흰 리넨 원피스를 한 벌 더 맞춰 두세요.
우리는 더운 곳으로 갑니다.”
“누구에게요, 부인?”
“그 분에게로요.”
그건 복수도, 복원도 아니었다.
그녀가 더 이상 상상 속의 남자와 대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검은 옷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아이의 트렁크에는 여름 원피스, 수영용 모자, 얇은 백과사전 한 권.
자신의 트렁크엔 편지, 사진, 백합향 잉크가 든 병, 그리고 하나의 기억 — 그가 떠난 날의 냄새.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말없이 작은 손으로 창문을 닦아내며 안개를 그렸다.
점심시간에 식사는 거절했고, 종이 냅킨엔 아이의 이름을 썼다가 구겼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도,
그가 떠났던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하녀는 그녀가 처음으로 입가를 손으로 가린 장면을 기억한다. 그것은 미소가 아니라 억제였다.
귤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보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여기에도… 그 밤이 도착할 수 있을까.”
그녀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말을 준비하지 않았다.
기억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그를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이는 편지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을
침묵 속에서 대신 보여줄 살아 있는 대답이었다.
햇살이 기울어진 오후,
담쟁이덩굴이 창틀을 반쯤 삼켜버린 삼층 석조 별장이
올리브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의 목소리가 터진다.
“엄마, 저기가 아빠가 사는 집이에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가 이 집에 아직 ‘살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기억으로만 눕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그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사냥모, 사냥 재킷, 각반과 발목 부츠.
쌍열 엽총의 총열은 땅을 향하고, 개머리판은 어깨에 얹혀 있었다.
왼손에는 꿩 한 마리 — 목이 꺾였으나, 온기는 아직 식지 않은.
그녀는 내린다. 계단이 아닌, 감정의 층계를 디디며.
그의 앞에는 죽은 꿩, 닫히지 않은 총, 말하지 않는 남자.
"죽었군요."
자신의 생각이었는지, 꿩을 보고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이 아닌 어깨와 뺨 사이를 응시했다. 감정은 그곳에서 흘러간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문득, 손을 잠시 놓았다가 다시 잡는다.
그것은 예방이었을까, 보호였을까, 질투였을까 — 아니면, 단지 '그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꿩은... 살았던 건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꿩의 목 아래, 총의 개머리판 안, 그녀의 손끝 움직임에 있었다.
그는 꿩을 던지고, 사냥개가 달려가 물어온다.
그제야, 그는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 —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맺힌 손끝으로 — 그녀의 뺨을 문지른다.
느리게, 매끄럽지 않게, 진득하게.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녀는 말하지 않고 감각한다.
'이게 사과라면, 더럽다.
이게 복수라면, 너무 늦었다.
이게 인사라면, 난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 끝으로 뺨을 훑고, 피의 맛을 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아이를 향해 선물을 준다 — 황동으로 감싼 산탄총 실탄 한 발.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들고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쏘지 않고도 쥐고 있어야 하는 것들.
그런 게 인생에는 종종 있어.”
그녀는 경악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사과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오래 남는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을.
실탄 한 발.
무게는 가볍지만, 의미는 추궁이다.
아이는 말없이 그것을 쥐고 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에게 겨눠진 것임을 깨닫는다.
실탄이 전해진 건 아이였지만, 의미는 자신에게 있었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감싸쥔다.
“너는 아직 그것이 뭔지 몰라도 돼.
그건 쥐는 것보다, 내려놓는 시기를 아는 게 더 어려운 물건이란다.”
그녀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당신은 사과하지 않았고,
사랑도 말하지 않았고,
무엇보다—책임도 말하지 않았죠
.
하지만 당신은 하나를 남겼어요.
그리고 그 하나는,
내가 끝내 지우지 못할 문장이 되었어요.”
그녀는 정원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감정은 피도, 사냥도 아닌—방향이다.
그녀는 응접실로 들어선다.
말 그대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존재를 남겨두기 위해 들어간다.
그는 실내용 가운을 입고 나타난다.
그녀는 뺨의 피를 가리키며 묻는다.
“그럼, 이건 이제 닦아도 되는 건가요?”
그는 수건을 들고 온다.
닦는 게 아니라, 누른다.
피는 번지고, 감정은 그대로다.
“당신이 닦고 싶은 건.
내 뺨인가요, 아니면 당신 기억 속의 나인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피 묻은 뺨에 입을 가져간다.
입맞춤도, 인사도 아닌 — 혀끝으로 피를 훑는다.
그녀는 숨을 들이쉰다. 그러나 말을 꺼내지 않는다.
이 순간, 말은 도피다.
그리고 그가 처음 입을 연다.
“그거 아나요? 난 이미 아비 노릇을 다 했다는 거.”
“쥐여준 것의 사용법은, 아이가 혼자서 찾아낼 겁니다.
제 아이가 맞다면 말이죠.”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에서 무언가 각을 세운다.
“그럼, 아이가 실탄을 어떻게 쓸지 몰라도 당신은 이미 면책됐다는 거군요. 가르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그저 그럴 수 있다는 전통을 핑계로요.”
그녀의 말은 기록처럼 정확했고,
그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선다.
공개 마지막 업데이트: 2025-07-07 10:21:32 AM